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랜태저넷 왕조 (문단 편집) == [[프랑스]]와의 연관성 == 앙주 백작 가문은 기본적으로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으로 시작한 집안이었다. 조프루아 5세 플랜태저넷 때 앙주, 노르망디, 투르, 멘의 영주였다. [[헨리 2세]] 즉위 이후로 결혼 및 정복을 통해 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티에, 브르타뉴 등을 획득했다. [[존 왕]]이 많이 털리긴 했지만 아키텐 서부, 즉 가스코뉴는 [[헨리 3세]]가 1259년의 [[파리 조약]]으로 회복했고, 이것이 [[백년전쟁]]을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 내 영토 문제와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고, 한때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시원하게 물리쳤으나 그 뒤 [[샤를 5세]]에게 밀리는가 싶었지만 다시 [[헨리 5세]]가 이끈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대승으로 파리까지 장악해버리고 프랑스 공주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잉글랜드 왕은 물론 프랑스 세자 [[샤를 7세]]를 제치고 프랑스 왕까지 한다는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위 계승과 영토 전역의 장악이 눈 앞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헨리 5세가 갑자기 죽고, 갓난 아기인 [[헨리 6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렇게 불안해진 와중에도 섭정공인 베드포드 공작이 잘 지휘하여 계속 우세하게 이끌었고 마침내 오를레앙을 포위하여 샤를 7세를 몰아붙여 프랑스 정복의 꿈이 현실로 이뤄질 무렵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를 구하러 왔다는 [[잔 다르크]]가 등장, 그녀에게 오를레앙을 비롯한 결정적인 여러 전투에서 치명적으로 패배하고, 원래 점령하고 있었던 대관식이 열리는 랭스까지도 그녀에게 빼앗기며 샤를 7세가 먼저 프랑스 왕에 정식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기 힘들어져버렸다. 결국 동맹을 맺고 있었던 프랑스 내 친잉글랜드 세력인 [[부르고뉴국]] 공작 [[선량공 필리프]] 3세의 도움 및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배신 덕분에 잔 다르크를 포로로 손에 넣어 이를 갈면서 그녀를 엉터리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와 이단자라고 억지로 몰아붙여 화형시켰으나 그 짓도 소용없이 부르고뉴 공작과 그 휘하 영주가 안 그래도 우세해진 프랑스 편으로 붙은 데다가('''아라스 조약''') 오히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 감정이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후로도 쭉 전세가 밀려 결국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잃는 것으로 끝났다. 최절정기에는 피레네 산맥에서부터 [[아일랜드]]를 포함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까지 앙주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또한 플랜테저넷 가문 사람들은 왕실 용어로 [[프랑스어]]를 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잉글랜드보다 프랑스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단정짓기도 또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당시는 현대와 같은 식의 국민국가적 정체성이 있었던 때도 아니었기에 잉글랜드 왕으로서의 정체성과 프랑스의 영주로서의 정체성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학자들이 지적하는 점이지만, 플랜테저넷 왕가의 역대 왕들은 프랑스 땅에서는 일개 공작이며, 프랑스 왕의 봉신일 뿐이었지만,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서열]]에 섰다. 본인들도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국제무대에서 프랑스 왕과 맞먹는 위상을 주는 잉글랜드를 결코 소홀이 여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정상회담]](...) 같은 거라도 열렸다고 치자, 만일 플랜테저넷 가문이 프랑스의 귀족 가문으로만 남았다면 아무리 잘나도 프랑스 왕 옆에서 꼽사리끼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까지 먹었다면 분명 프랑스 내에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지만 이런 무대에서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수준에서 설 수 있다. 즉 가문의 격 자체가 올라가게 되는 것.] 일단 문화적 정체성면에서는 리처드 1세의 시기에도 자신들의 근원인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상당히 잔존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잉글랜드 왕가라는 자각도 확실히 있었고[* 당시 프랑스의 왕인 필리프 2세와의 대화기록을 보면 리처드1세는 항상 '나는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서~' 등의 표현을 자주하는 등 프랑스의 왕과 동등한 일국의 왕의 지위임을 명실히 드러낸다. 물론 프랑스 영토의 영주로서 필리프 2세에게 [[주군]]이라는 표현을 하며 존중했었지만 더불어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지위도 확실히 표현했고 서로 국왕으로서 수많은 기싸움을 벌였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포로 수감으로 [[브리튼 섬]]을 오랫동안 떠나있을 때 잉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포로생활이 끝나자마자 [[런던]]으로 복귀, 왕 즉위식을 다시 거행하는 등 잉글랜드의 [[존재]]를 의식했다.] 에드워드 1세 시기로 접어들면 확실하게 잉글리쉬로서의 정체성을 가문 단위로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백년전쟁 당시 플랜테저넷 가문이 집요하게 프랑스 왕위를 원했던 것처럼, 프랑스를 일종의 고토로써 회복하려는 사고방식 또한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